2009년 10월 18일 일요일

써로게이트 (Surrogates, 2009)

 

 <디스트릭트9> 이라는 신선한(?) 작품 덕에, 브루스윌리스의 출연에도 불구하고, 관심밖으로 밀려난 <써로게이트>. 금요일 저녁 6시 30분 타임, 영통 메가박스에서 가장 큰 M관 상영중이었지만, 나를 포함 딱 2명이서 영화를 관람했다. 이렇게 극장을 전세 냈던 적은 5년전 <에일리언 2020, Pitch Black (빈 디젤이 본격적으로 액션 배우로 나선 영화)>을 조조로 4명이서 관람했던 이후로 가장 적은 숫자.

 

 

 영화는 인간에 의해 조종되긴 하지만, 인간을 대체할만큼 인간과 유사한 생김새를 가진 로봇, "써로게이트"-영어로는 대리, 대행자, 라는  뜻이다-가 실용화된 근 미래를 그리고 있다. 사람이 집에 누워서 기계를 뒤집어 쓰고 생각만 하면, 로봇이 실제 사람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사람처럼 아프지도 않고, 외관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혹은 원한다면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적인 능력도 가능하니, 너도 나도 "써로게이트"로 자신을 대신할 "대리인"을 원할 것은 자명한 사실. 이로 해서 전 세계의 99%의 사람들이 "써로게이트"를 이용하고, 덕분에 범죄도, 차별도, 사고도 사라진 유토피아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방구석에서 기계를 뒤집어 쓰고 로봇 조종이나 하는 인간미 없는 세상을 유토피아라 할 수 있을까?"

 

 나를 대신하는 "가상의 나"에 대한 이야기는 <다크시티>, <엑시스턴즈>, <13층>, <너바나>...그리고 결정적으로 <매트릭스>까지 여러 영화에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소재면에서는 다소 진부한 것도 사실이지만, "써로게이트"들의 매끈한 고무피부, 약간 어색한 움직임, 써로게이트 충전소, 써로게이트들 사이를 맨몸으로 지날때의 현기증의 표현 등등 영화의 디테일은 진부한 소재를 넘어 눈을 즐겁게 해주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의 줄거리나, 주인공들의 행동보다도, 영화의 설정들에 대한 질문들이 계속 머릿속을 떠다녔는데, 큰 줄기는 "내가 원하는 나를 이루어줄 수 있는 <가상의 나>가 생긴다면, 정말 범죄도, 차별도 사라지는 멋진 사회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영화에서는 써로게이트들의 모니터링과 통제 등에 따른 인권침해를 보여주긴 하지만, 써로게이트 자체는 살과 살이 닿는 인간적인 측면-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부부관계-의 약점을 제외하면 무척 긍정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영화에서와는 다른 "디스토피아"가 떠오르는데, 두어가지만 짚어보려한다.

 

1. 빈부의 격차, 그리고 차별은 써로게이트로 해서 심해질 것이다.

 써로게이트는 상품이다.(영화에서는 VSI라는 회사의 제품이다.) 즉, 부유한 사람은 비싸고 좋은 모델을 살터이고, 가난한 이들을 어쩌면 구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가격의 제품이 될 수도 있다. 혹은 구입하더라도, 비싸고 좋은 모델과 확실히 구별 될 것은 자명한 사실. 그리고 비싸고 좋은 능력의 써로게이트로 해서 처리하는 일의 양이나, 처리할 수 있는 일의 수준이 달라진다면, 저급 모델을 사용하는 가난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점점 가난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사람을 판단하는 모든 척도는 "얼마나 좋은 써로게이트"를 가졌느냐가 될 것이다.

 

2. 범죄는 증가할 것이다.

 모든이들이 써로게이트를 사용하기 때문에 살인은 줄어들지도 모르지만, "재물손괴"에 해당하는 범죄는 엄청나게 증가할 것이다.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고, 몽둥이로 내리쳐도, 부서지는 것은 상대방의 로봇일 뿐, 몇푼 물어주고 말자며, 상대방의 써로게이트를 파괴하는 행위가 빈번히 일어날 것이다. 또한, 오늘날 익명의 공간-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의 공격성을 볼 때, 써로게이트 뒤에서도 역시 유사한 공격적인 성향이 증가할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한다.

 

3. 강력한 감시와 통제 체계가 구축될 것이다.

 영화에서도 짚고 넘어가는 부분이지만, 써로게이트의 모든 영상과 기능을 중앙에서 관리할 수 있다면, 그 감시와 통제는 오늘날의 CCTV니, 핸드폰감청이니 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할 것이다. 아마 써로게이트로 보내지는 영상이나 소리를 컨트롤 해서 사용자에게 무의식적인 통제를 가하는 것조차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적다보니 영화보다 개인적인 "썰"이 길었다. 이제는 컴퓨터, 핸드폰, 각종 모바일 기기등이 없는 삶을 하루도 생각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 불과 20-30년전에는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세상이다. 어린시절 공상과학소설 속의 멋진 광경들을 보며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흥분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된 오늘, 과연 나는 그것들로 인해서 행복한 것일까. 그리고 20년, 30년이지나, 써로게이트의 세상이 다가 왔을 때, 과연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진다.

2009년 10월 11일 일요일

수원성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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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5일 월요일

揮景: 휘경, 사라지는 풍경

揮景: 휘경, 사라지는 풍경

20090918-20091008

통의동 보안여관

 

(이하 모든 이미지 출처는 neolook.com입니다)

 

 

 

  경복궁 옆길, 대림미술관, 진 아트 갤러리 등 제법 번듯한 건물이 늘어선 길 끝 코너에 누추한 건물이

두 개 보이는데, 하나는 브레인 팩토리 이고, 또 하나는 보안여관이다. 과거 서정주가 머물며 집필활동을

하기도 했다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보안 여관은,  일맥문화재단의 부설 연구소인 (주)메타로그 아트서비스

에 의해서 복합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첫번째 행사로 건물의 앙상한 뼈대

가운데서, 휘경동의 재개발을 주제로 하는 휘경, 사라지는 풍경展이 열렸다.

 

 

 휘경동 인근에 작업실을 얻었거나, 거주중인 작가 6명 강지호, 권용주, 김주리, 김태균, 김형관, 신은경은

2008년부터 동네의 재개발을 소재로 작업을 진행하고, 공공미술 프로젝트 <어디 사시나요?>를 진행했다.

이들은 300여명이 넘는 이웃들을 만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하고, 외대역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작업실을 떠나 집단적인 예술의 완성을 이루어갔다고 한다.

 

 

 재개발 정책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용산참사를 비롯해서, 전국이 재개발로 들썩이는 까닭에,

주위를 둘러보면 심심치 않게, 재개발을 내용으로 하는 예술 작업들을 만나볼 수 있다. 나 또한 예술이라긴

뭐하지만, 돌탑을 쌓아올리는 중이니까..., 한데, 이런 개인적인 작업들의 한계는 명백한데, 그 행위로 해서

직접적인 변화나 사회적인 결과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현장의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보탬 혹은

영향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적인 '감상'차원에서, 재개발이라는 소재를 '사용'

하고 있을 뿐이다.

 강홍구-은평뉴타운에관한 어떤 기록

Dream  House - 안규철/최원준 등

 

(물론 갤러리를 찾은 관객들, 언론에의 소개로 나타나는 2차적인 영향은 짚어 볼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꼭 작업이 아니라도, 개별적으로 당사자들에게 보탬이 될만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 최소한의변화를 위한 사진, 달력 참고. 위 링크의 작가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가 절대 아님을 노파심에 부연한다.)

 

 

그런 측면에서 직접 현장에서 주민들을 만나 당사자들의 행위를 예술의 전면으로 부각시켰다는 것 만으로도, 이들 6명의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시사하는 바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ps. 6명의 작가가 너무나도 부럽다.

 

2009년 10월 4일 일요일

City_net Asia 2009 아시아현대미술프로젝트

 

City_net Asia 2009

아시아 현대미술 프로젝트

20090930-20091122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2-3F

 

 

"<아시아 현대미술 프로젝트 City_net Asia 2009>展은 아시아 현대 미술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아시아 미술의 미래와 발전 가능성을 모색해 봄으로써, 현대 미술에서 아시아 미술의 위상을

확립하고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하는 격년제 현대미술 프로젝트이다."

    전시 소개 글 중에서..

 

서울 시립미술관, 이스탄불 현대미술관, 동경 모리미술관, 복경 금일미술관이 각각

양날의 검, 새로운 대륙 이스탄불, 오프 센터, 퇴적작용이라는 타이틀로 섹션을 나누어

도시별로 전시를 진행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김종구, 최수앙, 이명호 등 유명세를 탄 작가들이 대거 출품하였는데,

각각의 작업이 지나치게 구획이 나누어져 있는 탓에, 너른 공간에 작품이 흩어져있는

느낌을 주는 데다, 과연 이 작업들이 기획의도에 적힌 대로 "한국 현대사회에 자리하는 정치,

문화적 이슈들을 날카롭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들었다.

 

이를테면 이병호는 이전 작업들로 볼때 직접적인 시대 현실을 주제로 한다기 보다는

물질의 변화, 혹은 순환을 통해 삶을 고찰한다는 측면이 강하고,

최수앙의 경우도 구체적인 시대 상황보다는 다소 개괄적인 측면에서 사회로의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명호의 경우는 가장 생뚱 맞은데, 애초에 미학적인 관점에서 시작된 작업인 까닭에,

어떻게 해도 한국현대사회의 이슈들과는 관련을 짓기가 어려워보인다.

 

백번 양보를 해서, 한국의 현대사회라는 것이 이젠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 있으며,

과거의 치열했던 외적인 이슈들은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사실 절대 인정할 수 없지만!)

이제는 개인화된 내적 이슈 혹은 보편적인 문제들이 예술작품의 주제로서 드러나고 있다는 전제하에

작업이 선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작업들이 그런 문제의식을 관객에게 전달하기에

충분한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창원의 녹차 그림에서, 김종구의 철가루 그림에서

관객은 대체 어떤 문제의식을 떠올릴 수 있을까?)

 

결국 서울시립미술관측에서 내놓은 작업들은 한국현대사회의 이슈들을 다룬다기보다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질적인(유명세!?) 측면에서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향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서울 섹션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정윤석의 설치 작업

<Video Kill the Radio Star>에서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게다가 코미디프로 라디오 스타때문에 더더욱)

익숙한 음악 Video Kill the Raido Star의 뮤직비디오인 정윤석의 작업은,

미국을 상징하는 만화 캐릭터들, 코카콜라 상표, 미국 영화의 전형적인 이미지들,

레이건 대통령의 사진, 베트남전, 냉전시대의 사진 등을 교차시켜 보여주는데,

중간에 잠깐씩 흘러가는 88올림픽 마스게임 영상들이 있긴 하지만,

내용에서나, 형식면에서나 전세계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글로벌 스탠다드의 전형이라 할만 하다.

 

쉬넬 오즈멘&엘칸 오즈겐 <테이트 모던으로 가는 길>

할레 텐걀 <횡단면>

 

한편 이스탄불 섹션이 오히려 서울의 주제인 시대정신에 부합할만한 작업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일단 절반정도의 작업들이 영상물인데다가, 섹션 어디서나 보이도록 크게 전시된 쟈난 세놀의

<마침내 당신이 내안에...>라는 설치 덕분에 비엔날레같은 분위기마저 들게했다.

 

쉐넬 오즈멘&엘칸 오즈겐의 <테이트모던으로 가는 길>은 돈키호테를 패러디한 영상으로,

터키의 현대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고, 귤슨 카라무스타파의 <내면으로부터의 인식>은

어린시절의 가정 안에서의 기억과, 집 밖, 광장에서의 사건의 영상들을 재구성하고

교차시키면서, 개인에 비춰진 역사적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할레 텐걀의 <횡단면>은 이스탄불에서의 삶을 독백하는 영상인데, 화자의 가족이

이스탄불에 이주해오게된 역사, 그리고 과거 오스만 시대에 이스탄불의 이주 역사,

그리고 오늘날 이스탄불에 모여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스탄불의 시작에서

오늘까지를 관통하는 '어떤 것'을 건드리고 있었다.

 

비록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현실과 역사,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지만,

비 서구권에서라면 어느곳이든 상당부분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이 곳 서울의 관람객인 내게 있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앞서 서울 섹션의 주제의식과 작품 선정이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타카히로 이와사키<혼돈으로부터벗어나>

타카히로 이와사키<혼돈으로부터벗어나>

 

도쿄 섹션은 브로셔에 소개된 대로, 확산, 증식, 축적 등의 방식의 작업들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일본작가들의 작업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찌보면 정형화 되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만큼

일본적인 시각요소-판화(우키요에)적인 평면성, 장식성, 그리고 오늘날의 망가(만화)까지-를

꾸준히 현대미술에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로서는 부러운 부분이 아닐수 없다.

 

 

중국, 베이징은 큼직큼직한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었는데, 사진작업, 혹은 사진의 모사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전검열이 여전히 존재하는 나라로서,

대외에 공개되는 중국의 미술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느낌이 크기 때문에,

솔직히 베이징 섹션에 큰 관심을 갖고 보지는 않았다.

(아리랑 꽃씨展 글 참조)

 

 

아시아를 주제로 한 교류전의 성격을 띈 만큼, 각 지역의 특수성을 살펴보고, 또 그 안에서 아시아라는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전시의 기획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스탄불 섹션은 4개의 섹션 중 가장 빛을 발했다고 본다.

 또 같은 맥락에서, 서울 측은 지나치게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향함으로서, 보여지는 측면의

 화려함은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정작 핵심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2009년 10월 3일 토요일

단테01, 2007 & S.E.E.D 프로젝트 (2006? ^^)

 <단테01> SF라는 소리에 솔깃해서 네이버 평점을 보니 5점대... 뭔가 심각하구나 싶긴 했지만,

그래도 SF니까..봤다. 감독 "마르크 카로"의 필모그래피를 보니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델리카트슨 사람들>이 있다. 응? 두 영화는 장-피에르 주네 감독으로 알고 있는데..?

연출하시다가 독립하셨나? 한데, 찾아보니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델리카트슨 사람들> 모두

감독에 장-피에르 주네와 마르크 카로의 이름이 공동으로 올라있다. 알아보니, 마르크 카로는

만화 및 애니메이터로 활동했었고, 영화에서는 주로 미적인 부분을 담당했고, 장-피에르 주네는

내러티브에 치중하는 분업체제로 공동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마르크 카로가 홀로 감독에 나섰을 때에는, 내러티브에서 뭔가 부족할 거라는

예상이 가능한데... 예상대로, 영화는 정말 재미가 없다..ㅡㅡ; 우주선이라는 제한된 공간(+아마도 예산부족

으로 스케일을 키울 수 없었으리라...)에서 분위기는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대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빈약한 이야기를 난해한 영상들로 채워넣다보니, 꾸벅꾸벅 졸기에 딱 알맞다. 게다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줄거리에서나, 후반부 영상에서나 대니보일 감독의 <선샤인>과 겹치는 이미지가 많다.

 

 

 

 이렇게 재미없는 영화를 왜 굳이 블로그에까지 소개를 하느냐..하면...

사실, 보면서 10여년전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입학 후 컴퓨터 그래픽에 흥미를 갖고,

최고의 3D 영상을 만들어 보겠어 라던 때가 있었다. 당시는 3D 컴퓨터 그래픽이 일반화되지 않던 때라,

모니터 안에서 가상의 세계를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요새는 그래픽 영상들이 일반화 되면서 3D그래픽은 말 그대로 3D 업종으로 분류가 되는듯..)

이런 저런, 현실적인 벽을 구실삼은 이유들로 해서 3D 그래픽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 들었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 1인 단편 영화를 완성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스토리를 짜놓았는데,

<단테01>을 보며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스토리를 떠올렸다.

 

 스토리의 이름은 <S.E.E.D>...Search for Earth...어쩌구의 약자였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스토리 보기


사실 당시 나우누리 SF동호회의 단편 소설 <십자호의 최후>나, 폴 앤더슨의 <타우제로>(책을 구해서

 보고 싶은데, 보지는 못했고, 우주선의 추진 원리등을 참조..)를 참조한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 스토리이다.

 

<단테01>을 보면서 십자형태의 우주선, 테라포밍, 빡빡머리 죄수, 살신성인(?)등 여러부분에서 이미지가

겹치고 있는데.....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우연이라기엔 비슷한 생각들을 해내고, 그리고 그것을

영상을 옮길 의지까지 닮았다는 점이 무척 신기하기만 하다. 물론 나의 의지(?)가..마르크 카로의

그것만큼 대단하지 못하다는게 문제이지만..^^;

(위의 <단테01>의 이미지와  아래 동영상을 비교해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