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큐브와 블로거의 통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가 보다.
글하나 쓸려는데 계속 통합/이전 페이지가 뜨는 통에....
귀찮아진 김에 티스토리로 옮겼다..
별 내용도 없는 블로그지만...난민도 아니고....
매년 옮겨다니는 것 같다..
cafe24에 제로 보드 깔아 쓰다가, 텍스트 큐브 깔아쓰다가..
계정 용량문제로 텍큐로 왔다가.., 이제 또 티스토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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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옮겨다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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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 용량문제로 텍큐로 왔다가.., 이제 또 티스토리로....
최근 L모 기업에서 그룹 이미지 광고로 다문화사랑 캠페인 TV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이미 농어촌은 한국인 신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는 시점에서
참 시기 적절한 광고라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 과연 십수년이 지났을 때,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식될지 걱정스러운 생각도 든다.
특히나 우리처럼 나면서 죽을때까지 "한민족"을 강조하는 나라라면 더더욱...
십수년내에 커다란 사회 갈등의 요소로 자리잡을 가능성도 무척 크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이 광고를 보면서 내내 머리속에 떠다니는 작업이 있었는데,
한스하케의 <독일 주민에게 DER BEVÖLKERUNG>이다.
한스 하케는 소위 "정치적 예술"이라 분류되는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작업을 하는데,
대체로 미술과 자본의 관계, 그리고 독일의 역사의식들에 대한 작업이다.
그중 <독일 주민에게>라는 작업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2000년 찬반 양론 끝에
독일 국회 건물에 설치된 것이다.
![]() 국회건물에 새겨진 <독일 국민에게> | ![]() 한스하케의 <주민에게> |
자세한 내용은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학예연구사)씨의
<한스 하케의 DER BEVOLKERUNG - : 미술과 정치, 서로 말걸다.> 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빌헬름 2세 시절 독일 국회건물에 새겨진 "독일 국민에게"라는 글귀는 독일의 제국주의의 상징이며,
이후 나치가 사용했던 '국민', 혹은 '자국(게르만)민족'의 신비화에까지 닿아있는 글귀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맥락의 '국민'이라는 단어보다는 '주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한스 하케의 주장이다. (유태인학살의 과거와 네오 나치 등의 게르만 중심주의가
여전히 존재하는 독일이기에 더더욱 그러한 주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국회 벽에 새겨진 "국민에게"와 똑같은 글씨체로 "주민에게"를 써서 국회 안뜰에
화단을 꾸며놓은 것이었다.
"국민"에 대한 한스 하케의 주장-"주민"-은, (비록 독일은 2차대전의 가해자라는 차이는 있지만)
우리의 유별난 "민족"과 "국민"의 강조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월드컵 열기로 온 "국민"이 붉은 옷을 입고 거리에 나가 "대~한 민국"을 외치는 요즘,
비록 60여년전에는 역사의 피해자였지만, 지금 우리는 어쩌면 이미, "민족'과 "국민"의
가해자가 되어가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한스하케 작업에 대한 자료. (밍군 작성)
매일 일산(이라기보다 벽제에 가까운)에서 서울로 출퇴근 하던 동생 내외가
서울 옥수동 극동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지난 현충일 잠시 들러보니, 바로 맞은편에 옥수동 12/13 지구 재개발현장이 바라보인다.
작년 6월말에 옥수동 재개발 현장을 찾았으니, 벌써 1년여가 흘렀다.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던
그곳은 이제 깨끗하게 흙무덤이 되어 새로 올려질 아파트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1년여 동안 재개발, 아파트를 둘러싼 우려의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커져가는 이때,
과연 저기 벌거벗은 땅에 걸린 사람들의 희망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
잠시 아파트 난간에 몸을 맡기고 생각해본다.
작년 사진들 보기.
음력 새해 첫날 아침.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첫 메달 소식 - 5000m 빙속 이승훈선수의 -이 들려오고, 아버지와 어머니는(그리고 나도) 각자의 위치에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어머니와 (덩달은 나의) 짜증과 불평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고집을 꺽을 수 없어,
차례가 끝난 후엔 거듭 왕할머니(할머니의 이모) 제사도 지내야 했고, 치매와 더불어 담도세포암으로 요양 병원에서 계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부득불 집에서 하루 재우겠다고 하여 요양병원에도 다녀왔다.
결국 아버지의 바램-하룻밤 재워드리고픈 효도는 할머니가 담도에 삽입된 관(몸에서 나오는 진물을 제거하기 위한)을 잡아당겨 반쯤 나오게 만들어버리면서 급히 요양병원으로 되돌아가면서 마무리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고집 덕에 매년 전쟁터가 되어버리곤 하는 명절. 서로 그렇게 성질을 부리다가도 이내 아무일 없던듯 말은 건내곤 하는......가족이라는 건 참 단순하지가 않다.
John Baldessari <Igres and Other Parables> 시리즈 中 <Art History>
원문보기
A young artist had just finished art school. He asked his instructor what he shoud do next. "Go to New York." the instructor replied. "and take slides of your work around to all the galleries and ask them if they will exhibit your work." Which the artist did.
He went to gallery after gallery with his slides. Each director picked up his slides one by one. held
each up to the light the better to see it, and squinted his eyes as he looked "You're too provincial an artist." the all said "You are not in the mainstream." "We're lookinig for Art History"
He tried. He moved to New York. He painted tirelessly, seldom sleeping. He went to museum and gallery openings, studio parties, and artists' bars. He talked to every person having anything to do with art; travelled and thought and read constantly about art. He collapsed.
He took his slides around the galleries a second time. "Ah." the gallery directors said this time, "finally you are historical."
Moral: Historical mispronounced sounds like hystrerical.
젊은 예술가가 예술학교를 막 졸업했다. 그는 교수에게 다음에 할 일을 물어보았다. "뉴욕으로 가게" 교수가 대답했다. "모든 갤러리에 작품 슬라이드를 들고 다니면서 전시해 줄것인지 물어보게." 예술가는 그렇게 했다.
그는 슬라이드를 들고 갤러리들을 돌아다녔다. 각 디렉터들은 한장씩 슬라이드를 집어 들었다. 좀 더 잘 보기 위해 빛쪽으로 들어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너무 촌스럽네요." 그들 모두 이야기 했다. "당신은 주류에 들지 못해요.", "우리는 예술사적인 것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그는 노력했다. 뉴욕으로 옮기고, 끊임없이 그리고, 거의 잠도 자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박물관, 미술관 오프닝, 스튜디오 파티, 예술가들의 주점 등에 참가했다. 예술에 관련된 모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예술에 대해 꾸준히 읽고, 여행을 했다. 그는 쓰러졌다.
그는 두번째로 슬라이드를 들고 갤러리들을 찾았다. "아" 이번에 갤러리 디렉터는 이야기했다. "당신은 마침내 미술사적(Historical)으로 되었군요."
교훈: Historical은 Hysterical로 잘못 발음된다.
주1) 존 발데사리의 1967-71년 작업 <Ingres and Other Parables(앵그르와 다른 우화들)>은, 텍스트와 사진 이미지가 결합된 작업으로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미술세계에 얽힌 우화같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있다.
주2) 최근, 사진을 미술사적(Historical)으로 탐구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고 있다. 한데 내가 받아들이기에 내러티브보다 형식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경향이 뚜렷해 보여서, 여러가지로 생각이 복잡해지고 있다. 시도 한다면, 분명 눈에 띌만한 성장이 기대가 되긴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사진에 깊게 발을 들이거나, 혹은 내가 추구했던 것으로(그 추구했던 것이 무언가 이룩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게 우스울 수도 있지만) 돌아올 타이밍을 잃어버릴까 걱정도 된다. 뭐 될대로 되라지.
잡설: 미적 행위의 사회적 결과는 무엇인가?(열기)
![]() | ![]() | ![]() |
상왕십리 재개발 현장
각설하고, 그래서 이번 달력 제작이 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좋은 의미가 되지 않겠나 싶다. 위에 모인 <저명한>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공통의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더불어 내가 조금이나마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긍정적이다. 다만 달력 두어개 구입하고서, <난 할만큼 했어>라며 스스로 뿌듯해하기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날카롭게 생각하고, 다듬고, 내가 실천할 수 있도록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할 일이다. 사실 이런 글을 적는 일 조차 빈수레가 요란한듯 해서 부끄럽기만 할 따름이다. 묵묵히, 나아갈 수 있기를 다짐해본다.
ps. 이전 블로그에 들어와서 관계자가 확인하는 바람에, 심기가 불편해졌다해서 비공개로 바꿔두었던 글.
ps2. 구글 이전 기념으로 다시 공개로...설마 여기까지 찾아와서 보려나..^^;
ps3. 이 글 보고 관계자가 심기가 불편해져서 결국 전시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과연 전시때 어떻게 될런지.
2004년 3월 13일
지난 1월 용산참사 이후, 언론과 인터넷 상에서는 과격시위와 강경진압을 놓고 한동안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철거민들을 옹호하는 논리는 주로 그들이 처한 현실적 절박함을 이야기 했고,
그에 맞서는 사람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는 류의 원칙론을 펼쳤다.
양쪽 모두 그럴듯해 보이는 논란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무의미한 양비론을 제외하면)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심정적으로 '사회적 약자'라고 칭해지는 철거민들의 편에 쏠리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사태를 조금 냉정하게 살피자면, 갈등의 주된 주체인 (집주인들의)조합과 세입자를 비롯
시공사, 관련 행정 기관까지 각자의 '이득'을 위해 밀고 당기는 데다가,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경제 논리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편을 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굳이 절대惡을 뽑자면, 조합이나 세입자들과는
이해 관계가 없는척 하면서, 손안대고 코풀자는 식의 시공사를 뽑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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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주말에 밖으로 쏘다니며 달리다가, 드디어 농축된 피곤이 물밀듯이 쏟아지는 통에,
오후 1시가 넘도록 늘어지게 침대에서 뒹굴었다. 그리고 오늘은 집에 콕 쑤셔박혀 있기로 결심.
(물론 그 와중에도 영화 시간표를 뒤적거리며 I'm not There가 어디서 하는지 두리번 거렸지만...)
해서 간만에 시간이 생기니, 그간 쌓여있던 필름들도 정리하고, 그간 읽은 책들도 다시 한번
살펴보고...사람이 여유가 생기더란 말씀. 역시 사람이 마냥 달리면서 살수는 없는가보다.
방구석에 쌓여있는 필름을 정리하려고 필름첩을 꺼내들었는데,
필름첩 위에 놓은 필름은 대여섯 롤 정도..
'생각보다 많이 찍지는 않았구나..'
하며 필름첩을 열었는데..이런..스무롤 이상의 정리되지 않은 필름들이 우루루 쏟아진다.
'많이 찍기는 많이 찍었구나--;;'
![]() 추억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 ![]() 이쯤 되면 뭐가 뭔지 알아보는게 일이다. |